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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학사

1945년부터 1950년까지 개관과 시 1

by 데일리쥬 2024. 11. 21.

  해방은 우리 민족에게 기쁨만을 선물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 민족의 의사와는 다르게 주어진 분단이라는 비극의 현실 앞에 슬픔을 억누를 길 없었다. 또한 분단의 상황은 문인들에게도 분열과 투쟁으로 나타났다. 해방의 문학사적 의미는 이러한 혼란기에 민족 문학 수립이라는 진로 모색 단계에 있었다고 할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의 승리로 얻어진 해방은 그러나 완전한 독립이 되지 못하고 남북이 미국과 소련의 양대 진영에 의해 나누어진 채 아무런 준비 없이 맞이하게 되었다. 1948년 남한만의 정부가 수립되기 이전에는 38선을 경계로 하여 남북으로 갈라진 상태에서 정치적 혼란기를 맞을 수밖에 없었으며, 36년간의 일제 수탈에서 벗어나긴 했으나 경기는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민족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데올로기 대립과 경제적 파탄은 사회의 혼란을 가중했으며, 이러한 가운데 문학인은 해방을 맞은 기쁨보다 앞으로의 자세와 진로 모색이 급선무였다.

 

 

  첫째로 문인들은 과거 일제 강점기에 잃었던 문학을 되찾고 식민지 시대의 문학적 유산을 청산해야 했다. 과거 친일문학의 잔재를 버리고 민족 문학을 수립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시급한 문제였다. 그리하여 일제 말기에 끊어졌던 문학사의 공백을 메우고 새로운 문학사를 정립하는 일이 중요한 과제였다. 

 

 

  둘째로 잃었던 우리말과 우리글을 되찾는 일이었다. 일제 말기 언론 탄압으로 잃어버린 국어를 되찾는 국어 순화의 길이 문인들에게는 매우 절실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셋째로는 남북 분단 상황에서 제기되는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극복하는 문제였다. 해방과 더불어 1920년대 후반기에 극심한 대립을 보였던 프로문학 대 국민문학의 재판이 벌어진 듯하였다. 사회주의 문학을 옹호하는 문인들은 해방이 되자마자 제일 먼저 '조선 문학건설본부'라는 간판을 서울 한복판에 내걸었다. 그것은 임화, 이태준, 김남천, 이원조 등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우리의 문학에서 정치적 이념을 몰아내고 순수문학을 지향하는 것이 크나큰 과제였다. 조지훈은 1946년 4월 4일 청년 문학가협회 창립대회에서 발표한 '해방 시단의 과제'에서 "해방 후 시단은 사이비 시의 범람기'라고 단정, 사상의 예술화를 주장하는 한편 "민족시의 세계시에 공언할 역사적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전통을 바르게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해방 직후의 문단은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매우 심각한 양상을 띠고 있었다. 그것은 우선 문학 단체의 결성에서부터 드러났다.

 

 

  해방 전 5년 동안은 우리 문학의 공백기나 다름없다고 하겠다. 1939년부터 문화 말살 정책으로 일제의 탄압이 시작되어 1940년대에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강제 폐간되었고, 그 이듬해에는 '문장'이 폐간되더니 '인문평론'은 '국민문학'으로 개제, 친일문학의 온상으로 둔갑함으로써 사실상 폐간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와 같은 언론 탄압으로 문인들은 문학 활동을 중지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당시의 문인들에게 가장 치명적인 것은 우리말과 우리글의 사용을 금지당하고 친일문학만 허용되었던 일이다. 그리고 1939년에 결성된 '조선문인협회'는 군국주의적인 일본에 협력하게 하려고 1943년에는 '조선문인보국회'로 이름까지 개칭하였으며, 언론 탄압으로 1942년 10월에는 한글학회 사건도 일어났다.

 

 

  이러한 가운데 극히 제한된 속에서도 몇 권의 시집이 나왔음을 문학사는 기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 우리 문학사에서 빛나는 몇 명의 시인을 잃었다는 것은 크나큰 손실이다. 1941년에는 이상화를, 그리고 1944년에는 한용운과 이육사를, 1945년에는 윤동주를 각각 잃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되자 그다음 날로 '조선문인보국회'의 간판은 내려지고 바로 그 자리인 서울 종로 한청빌딩에는 '조선문학건설본부'라는 새로운 간판이 내걸렸다. 좌익 계열의 임화, 이태준, 김남천, 이원조 등이 주동이 되어 어떤 회합도 하지 않고 우선 간판부터 내건 것이었다. 이어서 '조선문학건설본부'와 함께 '조선음악건설본부', '조선미술건설본부', '조선 영화건설본부' 등의 간판이 나란히 걸리게 되면서 이들이 연합하여 '조선 문화건설중앙협의회'가 발족하였다. 이러한 모든 조직의 지휘는 임화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따라서 임화는 '조선 문화건설중앙협의회'의 서기장으로 취임하였다. 이들 배후에는 공산당의 세력이 있었고, 1935년 일제의 강요에 의해서 해산되었던 당시의 카프 조직이 배경이 되었다. 

 

 

  '조선 문화건설중앙협의회'가 결성되자 이들과 대결하려는 일파가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그들은 카프와 대결했던 민족 문학 파와 해외문학파의 변영로, 오상순, 박종화, 김영랑, 이하윤, 김광섭, 오종식, 김진섭, 이헌구 등이다. 이들은 1945년 9월 8일 '조선 문화협회'를 결성하고 좌익 계열 문인들과 맞섰다. '조선 문화협회'는 바로 '중앙문화협회'로 이름을 바꾸었고, 새로운 사람으로 양주동, 서항석, 김환기, 안석주, 허영호, 유치진, 이선근, 조희순 등이 가담하였다. 회지도 내고 전 문단을 망라하는 '해방기념시집'을 간행하기도 했다.

 

 

  카프 해산 당시 해산을 반대했던 이기영, 한효, 송영, 윤정기 등은 이동규, 박세영, 홍구, 홍효민 등과 함께 야소 빌딩에 모여 1945년 9월 17일 '조선 프롤레타리아문학 동맹'이라는 새로운 조직을 발족시켰다. 결국은 좌익 계열의 두 단체와 우익 계열의 한 단체가 탄생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