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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학사

1930년부터 1945년까지 개관과 시

by 데일리쥬 2024. 11. 10.

  전체 한국문학사에서 근대문학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근대에 접어들면서 한국문학은 비로소 민족문학의 본론화 과정에 접어든다. 세계 문학사에 한 물줄기를 이룬 작품을 산출하기 시작하는 것도 이 무렵부터다. 그런데 한국근대문학사에서 1930년대의 시가 차지하는 좌표는 매우 결정적이다. 그 이전까지 한국의 시와 시단은 좋은 의미에서 근대의 차원에 머물러 있었다. 뿐만 아니라 거기에는 다분히 소박한 단면 또는 풋풋함 같은 것도 섞여 있었던 것이다. 1930년대에 이르면서 한국의 시와 시단은 이런 미숙성을 그 나름대로 극복해 낸다. 그리고 그에 대체해서 현대적인 국면을 타개해 간 것이다. 물론 1930년대의 한국시가 완벽한 상태로 형성, 전개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 가운데는 시행착오 현상이 있고 상당한 부작용도 게재해 있다. 그러나 총체적으로 보면 이 연대의 시는 성공적인 경우다. 우선 이연대에는 유달리 많은 시인이 배출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제작해 낸 작품 가운데는 한국 현대시사에서 양질, 가작으로 손꼽힐 작품들이 포함되어 있다. 오늘 우리 주변의 시 가운데는 상당수의 작품이 그들의 영향권에 속해 있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1930년대의 한국시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다.
  1930년대의 한국시는 한 무리의 전위적인 시인들에 의해 그 막이 열린다. 그들이 곧 시문학 파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이 유파의 명칭은 1930년 3월에 창간된 시 전문지에서 연유한다. 시문학파의 중요 구성원은 박용철, 정지용, 김영랑, 신석정, 이하윤 등이다. 이들이  발간에 참여한 경위라든가 사정은 물론 똑같지 않다. 그 가운데는 정지용이나 이하윤처럼 이미 한국 문단에서 상당한 활동 경력을 가진 이들이 있다. 그런가 하면 박용철과 김영랑처럼 비로소 문단에 등장한 시인도 있다. 그러나 그런 사정에도 불구하고 시문학파가 형성되자 그들의 작품에는 일종의 공통 특질 같은 것이 형성되었다. 그 하나는 반 이데올로기 순수 서정을 추구하는 경향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작품의 표현 매체인 언어에 기울인 각별한 애정 또는 관심이다. 우선 시문학파가 간직한 표현 매체에 대한 관심은 그 창간호의 편집후기를 통해서도 나타난다. 그들은 "한 민족의 언어가 발달의 어느 정도에 이르면 구어로서의 존재에 만족하지 아니하고 문학의 형태를 요구한다. 그리고 그 문학의 성립은 그 민족의 언어를 완성하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여기서 구어란 물론 단순하게 문어의 상대어로 그치는 개념이 아니다. 그보다는 한 언어사회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쓰인 말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때 박용철이 말한 문학이란 곧 시 그 자체다. 이 말이 나오기 전에 박용철은 "우리의 시를 살로 새기고 피로 쓰듯 쓰고야 만다. 우리의 시는 살과 피의 맺힘이다."라고 적었다. 이런 어세로 보아서 그에게 문학이란 시 이외의 그 무엇일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 문학이 민족어를 완성하는 용광로 또는 풀무와 동격이 된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시의 표현 매체에 대해 박용철은 각별하게 신경을 쓴 셈이다. 이 경우에 문제 되는 '언어의 완성'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도 궁금한 일이다. 시문학파의 작품들을 보면 그것이 말들을 아끼고 부려서 갈고 다듬어 쓰는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시문학 파는 워낙 훌륭한 한국 시사상의 역군들이었다. 이들의 출현으로 한국 근대시는 비로소 거대한 순수 서정시의 산맥을 가진다. 그 골짜기의 들판에는 양이 풍부하고 빛깔도 푸른 감성의 물줄기가 넘쳐흘렀다. 그러나 이런 긍정적인 면과 함께 거기에는 지양이 요구되는 일면도 있었다. 시문학파에게도 그들이 기도한바 시의 새 지평 타개를 위한 표준이 존재했다. 그런데 그것은 대체로 중국의 고전이 아니면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 쪽의 근대시였다. 이런 경우의 우리에게 좋은 증빙 자료가 되는 것이 이다. 어느 때고 좋은 시를 위해서는 전통에 대한 의식과 함께 첨단적이며 전위성이 강한 외국 문학의 충격이 요구된다. 그런데 시문학파에는 그런 쪽에 대해 손길을 뻗친 자취가 잘 나타나지 않는다.
  시문학파가 어느 정도 제 테두리를 굳히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초반 무렵이다. 그러자 한국 시단에는 그들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고개를 쳐들고 나타난다. 그것을 담당한 것이 모더니스트의 갈래에 드는 일군의 시인들이다. 모더니즘 또는 모더니스트라는 말에는 물론 몇 개의 외연이 있다. 유럽에서 이 어사는 중세의 권만을 내세운 제도 우선주의 대한 상대개념으로 쓰였다. 거기서는 인간 중심의 종교운동을 벌인 상황이 이런 이름으로 불리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와 예술에서 1930년대 한국 시단에 뿌리를 내린 모더니즘은 크게 두 개의 갈래로 나타났다. 그 하나는 영미계 쪽에 그 원천을 둔 이미지즘, 주지주의계의 온건한 모더니즘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가 격렬하게 부정, 파괴의 단면을 띠고 나타난 초현실주의계의 모더니즘이다. 
  먼저 앞선 계보에 속하는 모더니즘 운동은 김기림에 의해서 주도되었다. 그가 우리 시단에 등장한 것은 1930년대 초두부터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가 이미지즘, 주지주의계의 작품을 쓴 것은 아니다. 처음 얼마 동안 그는 암중모색의 상태에서 서구의 현대시에 영향을 받은 듯한 시를 발표했다. 그러다가 1933년도에 그는 시론을 발표한다. 여기서 김기림은 그 이전 그가 가진 미래파, 초현실주의를 지양, 극복한다. 그러고는 좋은 시 또는 현대시의 길이 작품 제작에 지성을 도입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못 박은 것이다. 이후 그는 끈질기게 그 나름의 모더니즘 운동을 편다. 그는 창작의 실제에서 강력하게 한국 모더니즘 시의 가늠자 구실을 하는 작품들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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