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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학사

1920년대 근대시의 전개

by 데일리쥬 2024. 11. 2.

  삼일 운동을 분기점으로 하여 일제 무단통치에 대한 우리 민족의 저항 운동은 여러 갈래로 전개되었다. 안창호의 준비론류의 온건론은 우선 민족역량의 배양을 절실한 과제로 인식하여 갖가지 활동을 펼쳤다. 그 하나는 민립대학설립운동으로 대표되는 각급 교육기관의 설치와 국민 대다수의 교육을 실시하려는 움직임이었다. 다른 하나는 각종 단체의 결성, 잡지나 일간지의 발행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려는 활동이었다. 비록 삼일 운동은 가시적으로는 실패한 운동이었으나 이를 계기로 응집되어 분출하기 시작한 민족적 역량과 저항운동은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 다방면에 걸친 광범위하고도 깊이 있는 것이었다. 특히 문화적 저항운동은 앞서 말한 준비론을 바탕으로 하여 일정한 민족 역량의 축적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이 가운데 조선일보, 동아일보 두 일간지의 발행과 개벽 등의 잡지 발간은 1920년대 우리 문학의 전개와 발전에 직접적인 기여를 하게 되었다.

 


  삼일 운동 이후 시의 활발한 생산과 수용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첫째, 자유시로의 갈래 정착, 둘째, 신문, 잡지, 동인지 등을 통한 발표 양식의 변화, 셋째, 담당 층의 확산 등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자유시로의 갈래 정착은 삼일 운동 직전까지 있었던 다양한 형태의 시가들이 서서히 시의 범주 밖으로 밀려나고 자유시만이 중심적은 형식으로 남게 된 현상을 말한다. 이는 앞선 시기에 있었던 중세적인 시관의 해체와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근대로의 전환에 따라 새로운 삶의 양식이나 생각을 표현하기 위한 시가 형식이 모색되면서 종래의 시 형태들이 활기를 잃게 된 것이다. 또 그 모색 과정에서 종래 시가의 여러 형식이 나름의 변모를 추구했으나 결국은 실패로 끝나고 새로운 역사적 갈래로서 자유시만이 남게 된 것이다. 두 번째, 발표 양식의 변모는 신문, 잡지, 동인지 등을 중심으로 한 시의 발표로 바뀐 사실을 의미한다. 이는 인쇄 매체의 발달에 따라 작품은 인쇄된 형태로 발표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굳어진 결과이다. 아울러 저작권 개념이 시인들에게 생겨나 종래 가명, 필명, 호 등으로 잡다하게 기명되던 현상이 불식되고 자기 이름을 반드시 밝히는 일이 보편화되었다. 요컨대 발표 지면의 확대는 물론 저작권 개념이 성립되어 시인의 이름 내지는 개성이 중시되게 된 것이다. 이는 조연현이 전문적 시인의 출현으로 설명한 사실이기도 하다. 셋째, 담당 층의 확산은 시의 생산과 수용이 모두 근대적 학교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다. 애국계몽기로부터 1910년대에 걸쳐 시의 담당 층은 전통적인 유학자에서부터 근대적 학교 교육을 받은 이들에까지 폭넓게 걸쳐 있었으나, 이제는 후자에 속하는 시인과 독자들이 주를 이루게 되었다. 특히 창조, 백조, 폐허 등의 동인들이 모두 국내와 일본에서 근대적인 학교 교육을 받은 사실은 이를 단적으로 증명한다. 

 


  1920년대 우리 시의 위상과 흐름은 크게 세 갈래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첫째는 흔히 낭만주의 시로 일컬어진 초기의 위상이며, 두 번째는 현실 수용과 그 비판의 사회 시, 세 번째는 민요시의 위상이 그것이다. 이 세 위상과 흐름에서 특히 그 시적 성취와 관련하여 주목할 수 있는 것은 김소월, 한용운 등의 '님' 지향의 시적 흐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920년대 초 동인지를 통하여 대거 등장한 시인들의 시를 낭만주의 시로 묶는 데에는 다소 무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미 우리의 근대문학을 서구식 시조 개념으로 이해하고 정리하는 데 따른 무리와 한계는 많은 논자에 의하여 지적된 바와 같다. 여기서 이 논의를 되풀이할 필요는 없겠으나, 대체로 이 시기의 시들이 미적 거리 조정의 실패에 따른 과도한 감정 분출과 현실도피적 성향을 보인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낭만적 성향의 시들로 묶는 데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이는 낭만적이라는 용어를 굳이 서구식 사조에 국한된 개념으로 보지 않고 보편적 개념으로 이해할 때 더욱 그러하다. 그런데 이 낭만적 성향은 주요한, 홍사용, 박종화, 이상화 등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이들은 주로 대상의 감각적인 해석과 시어의 확충, 시의 장형화, 감정의 과도한 표출과 현실도피적인 경향을 주도하였다. 당대의 시에 있어 대상의 감각적인 해석은 앞선 시기의 시에 비하여 매우 주목할 만한 발전이었다. 곧 애국계몽기의 시들이 짙게 간직한 이념 일변도의 성격을 염두에 둘 때 이 같은 사실은 획기적이라고 하여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시가가 그 국민의 기를 진작하는 중요한 수단이라든가, 시인 곧 세계를 도주하는 자라는 등 전 시대의 인식이 이 시기에 이르러 크게 전환하였던 것이다. 이는 시가 타율적 기능에만 의지하지 않고 그 독자적인 원리나 목표를 지니고 있다는 시관의 변모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시관의 이러한 변모는 시인으로 하여금 대상을 독자적인 존재로 이해하게 하거나 해석하게 한다. 시에서 대상을 감각적으로 해석하는 일은 외재적인 도덕률이나 이념에 의한 일방적 풀이를 거부하는 일이 된다.

 

 

  그다음 지적되는 시어의 확충은 1920년대 시에 두드러지게 많이 사용된 말들, 즉 꿈, 님, 영원, 명일, 정열, 눈물, 미와 같은 언어의 출현을 뜻하는 말이다. 이들 시어는 흔히 번역시에서부터 비롯된 것으로, 1921년 출간된 김억의 오뇌의 무도는 이 경우의 현저한 예가 된다. 시어를 일상어와 다른 영어로 치부한 예는 차치하더라도, 종래와는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아취 있는 말로 하려는 노력은 당시 보편적인 현상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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