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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학사

1920년대 근대소설

by 데일리쥬 2024. 11. 10.

  소설은 인간의 삶에 대해 알고 싶은 욕구를 충족하기 위하여 발생한 문화 양식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작가는 인간이 세계와의 대면에서 세계를 인식하는 여러 현상과 방식들을 제공하게 된다. 바꾸어 말하면 세계에 대한 작가의 인식 방식을 드러내는 셈인데, 그 세계란 인간과 인간의 관계 구조 속에서의 인간과, 인간과 사회(제도)와의 관계 구조 속에서의 사회인 두 세계이다. 따라서 한 편의 소설은 소설 속의 삶이 주로 인간 성정이 문제가 되어 야기되는 삶이거나 사회 제도가 문제가 되어 야기되는 삶 두 측면을 가진다. 이는 곧 인식의 두 측면인데, 이런 기본 입론에 입각하면 이 두 측면은 다시 각각 두 갈래로 분류할 수 있게 된다. 즉, 소설에서 주인공의 삶이 인간 성정에 의해 문제가 되더라도 타인의 성정으로 인한 것과 세계에 대한 주인공 자기 자신의 성정으로 인한 것이 두 가지이고, 주인공의 삶이 사회 제도에 의해 야기되는 문제이더라도 과거의 제도로 문제가 발생하느냐, 당대의 현 제도로 해서 발생하느냐 두 가지고 갈라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소설 양식은 이런 인식의 기본 갈래가 항상 병행되면서 각기 시대적 인식 변화를 겪는다. 가령 우리의 고전 소설도 인간 성정이 문제가 된 소설과 사회 제도가 문제가 되어 형성된 소설로 구분된다. 처첩 간의 갈등이나 애욕의 갈등은 대개 선인에 대한 악인의 성정이 문제가 된다. 그러나 이는 타인의 성정이 문제가 됨으로써 권선징악적 윤리 소설이 되고 만다. 사회 제도가 문제가 되더라도 지나간 어느 옛날 왕조 때의 제도가 문제가 되어 현재의 제도 문제를 피한다. 신소설의 경우도 구제도에 대한 문제로 시각을 바꿈으로써 신제도에 대한 문제를 피했다. 물론 사회 제도 문제더라도 소설 속에서는 제도적 인물로 형상화된다. 

 


  그런데 근대소설, 즉 1920년대에 들어오면 이 큰 두 가닥의 성격이 변화한다. 하나는 인간 성정이 문제가 되더라도 주인공 자신의 성정, 즉 개인주의적 절대 자유 사유에 의한 세계 인식으로 되고, 또 다른 하나는 사회 제도더라도 당대의 현 제도에 대한 문제를 바로 다룬다. 기존 제도의 바른 수행이 아니라 개조에 목적을 갖는 것이다. 역사의 피동체가 아니라 능동적 주체로 된다. 1921년에서 1930년 사이의 소설을 이런 시각에서 보면 하나는 개인주의적 소설군과 사회주의적 소설군으로 구분되는 인식의 지평을 보게 된다. 1920년까지의 문단에서 이광수와 김동인은 이런 대조적인 두 갈래의 한 가닥씩을 안고 교차하는 이인 극을 이뤘는데, 1921년의 인식 지평에서 볼 때 김동인은 한 가닥의 성격이 뚜렷하지만 이광수는 그 노선이 애매함을 알게 된다. 차라리 동시대의 신채호 소설이 노선 면에서 뚜렷하여 이광수의 어물쩍한 위치를 비켜 넘은 것으로 보인다. 1921년에서 1930년 사이는 소설의 이런 두 인식 지평이 열리면서 각각은 다시 분화를 일으켜 다음 시기의 여러 현대소설적 남상을 만든다. 따라서 1921년부터의 소설사 재점검은 인식 변화의 명확한 구획을 가른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본다.

 


  김동인의 상당수 소설은 있을 수 없는 세계를 다룬다. 그는 자연주의 작품이라는 "감자"조차도 복녀는 인형처럼 무대 위에서 조종되고 있는 것이다. 복녀가 그렇게 벙어리인 점은 이를 입증하는 것이다. 그는 소설을 작가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마치 인생을 작가가 요리한다고 착각을 한 것이다.

 


  염상섭은 그 반대로 소설은 있는 세계를 사실대로 그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작가는 인생을 이리저리 요리할 수 없는 것이고 더구나 삶의 이것저것에 관여하여 비평하는 것은 월권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주어지는 대로의 삶의 이모저모를 자기 개성에 맞게 찾아서 실감 나게 묘사해 주는 것, 기록해 가는 것이 작가의 한계라는 생각이다. 염상섭의 초기작이 의식 과잉, 주관 과잉이라고들 하지만 그리된 원인이 바로 앞에서 지적한 그의 입장에서 온 것이라고 본다. 심리묘사 역시 있는 대로 다 묘사해야 한다는 입장이면 그리될 수밖에 없다. 그는 점점 객관적 묘사 과잉으로 급회전했는데, 실은 초기의 의식 과잉이란 것이 묘사 과잉이었던 것에 다름 아니다. 그는 자기 개성에 맞는 소설적 현상을 찾아 사진 찍듯 전달하는 한계를 벗어나지 않는다. 주제 빈곤이라는 지적은 안일한 소시민적 의식에서 나온 것이라 본다. 객관 세계와 관계없이 단편적인 개인적 삶에만 관심을 둔 것이다. 그의 소설 대부분은 세계 속에서 자기와 자기 가족만이 사는 개인주의적 삶에 사진기를 갖다 댄 것이다. 평범한 일상성에 대한 취급은 각각의 개인주의적 삶인 것이다. 그의 개성주의란 개인주의적인 것의 표리에 지나지 않는다.

 


  현진건은 염상섭과는 그야말로 대척적인 자리에 놓인다. 그의 소설은 개인의 사회적 삶에 관심을 둔다. 홀로 사는 삶이 아니라 함께 사는 삶을 아파하는 것이다. 나의 삶에 고민하기보다 타인의 삶에 관심을 가진다. 지식인의 고민이 자기 출세에 있지 않고 잘못된 사회에 있다. 그러므로 그는 "운수 좋은 날"과 같은 역작을 낳을 수 있었던 것이다. 식민지 치하의 고통은 지식인도 김 첨지 같은 고통을 동일하게 겪는 것이다. 초토가 된 조선의 고통을 마치 혼자 안은 것처럼 괴로워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현진건의 작품에는 미래가 부정되지 않는다. 참고 견디면 내일의 밝음이 온다는 희망을 품게 하는 것이다. 한편 그는 정직한 작가였다고 하겠다. 작품과 작가 사이가 밀착되어 신뢰되는 특징이 있다. 그의 소설에서 때로는 흠결로 지적되는 극단화 현상이 그 예이다. 하지만 이것은 흠결이 아니라 작가의 솔직성 때문이라고 판단된다. 세련된 겸손과 위선보다는 이 정직하고 솔직한 원시성이 진실성을 확보하며 또 그를 통해 애정과 연민이 역설화 되기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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