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희곡 문학 발전 과정에 있어서 1910년대는 매우 특이하면서도 중요한 시기이다. 왜냐하면 일본에서 들어온 신파극이라는 새로운 근대극 양식을 맞아 수백 년 동안 흘러온 재래의 전통극이 중앙무대를 잃고 변두리로 밀리면서 급속히 퇴조해 갔기 때문이다. 물론 처음에는 날탕패 박춘재 일행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전통극은 신파극과 충돌이 아닌 타협의 길을 모색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일 두 나라 문화의 간극만큼이나 큰 두 가지 연극 양식의 이질성 때문에 곧 각자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박춘재 일행과 창극 단체들은 구파로서 도시의 변두리와 지방을 유랑하게 되었고 신파극은 중앙과 주요 극장을 중심으로 공연 활동을 벌이게 된 것이다. 신파극이 우리나라 대중의 가장 중요한 오락물의 하나로 정착하면서 근대적 형태의 희곡문학도 싹트게 되었다. 주지하다시피 신파극은 메이지 시대의 일본에서 처음 생겨난 연극 양식으로서 구극인 가부키에 대립하는 명칭으로 사용되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파극의 표현 양식은 가부키로부터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분장, 표현술 등이 매우 과장되었고 여형배우, 스타 시스템 등을 특징으로 하는 감상극이었다. 신파극이 일본에서 발생, 성숙해서 이 땅에 유입되다 보니 레퍼토리도 그대로 전해질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 정치극으로 시작되어 군사극, 탐정극, 가정비극 등으로 발전된 신파극 레퍼토리의 내용이 한꺼번에 수용되었던 것이다. 초기에는 극본도 없는 식으로 시작되었지만 점차 메이지 말기의 대중소설을 각색한 가정비극이 주류를 이루었다. 즉, 일본에서 대중소설로서 인기를 끌었던 대부분의 작품이 신파 무대에서도 인기를 끌었고 그것이 다시 우리나라에 번안됨으로써 역시 인기 레퍼토리가 되었던 것이다.
최초로 활자화된 조일재의 병자삼인만 보더라도 이 작품이 신파극 형식을 취했고 전통적인 윤리관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는 일본의 대중소설과 신파극을 주도적으로 소개한 작가였으므로 메이지 시대 일본 대중의 정서에 빠져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조일재는 1910년대에 들어서도 19세기말 일본 대중작가의 도덕률에 입각해서 시대를 파악하는 우를 범했던 것이다. 즉, 그는 개화기의 시대 흐름에 따른 관심사라 할 여권 신장을 작품의 주제로 삼았으면서도 실제로는 풍자로 갔던 것이다.
이 작품에는 세 쌍의 부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세 여성이 모두 남편들보다 사회적으로 우위에 있다. 여기서 남성들은 좌절과 저항을 느끼게 되고 아내들을 굴복시키는 위장극을 연출한다는 내용이다. 이 작품의 주제라고 한다면 남존여비의 인습을 타파해 보려는 여성들과 그것을 옹호하는 구식 남성과의 갈등인데, 남성들이 단순히 남편이라는 기득권을 내세워 아내를 굴복시킨다는 점에서 매우 전근대적이다. 이러한 작품의 결말은 두 가지 각도에서 분석될 수 있다. 그 하나는 조일재가 변화하는 새 시대에 발을 딛고 있으면서도 메이지 시대의 대중소설에서 문학을 배웠기 때문에 여전히 유교 모럴에 입각해서 사회를 보았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는 작품에서 여권 옹호를 긍정적으로 보기보다는 오히려 급속한 여권 대두를 냉소적이면서도 경계의 눈으로 본 것이다. 두 번째로는 그가 순전히 신파극만 했기 때문에 전형적인 산파 형태의 멜로드라마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가 중심인물을 남성으로 설정하고 적대적 인물을 여성으로 설정하여 양성 대립으로 만들었고 자연스럽게 여성들의 패배라는 결말에 이른다. 그러니까 보수적인 조일재는 소위 여권 신장이라는 것을 조롱하기 위하여 병자삼인이라는 작품을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그는 계몽주의나 근대적 자각을 통해 작품에 투영할 만큼 근대적 의식을 성장시키지 못했고 그 결과 변천하는 사회를 오히려 부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그 점은 형태상의 낙후성에서 도욱 심하게 나타나고 있다. 소극 형식으로 되어 있어서 가정비극형의 신파와 다른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희곡을 자세히 살펴보면 일본 신파에 매우 가깝다. 우선 작가가 제시한 무대 디렉션만 보더라도 하나미치가 세 장면씩이나 예시되어 있다. 게다가 막의 개폐 신호마저 타목음을 사용하고 있는 점에서 당시 유행하던 일본식 신파극을 답습했음을 확인할 수가 있다. 이러한 형태상의 전근대성뿐만 아니라 인물의 성격 구축에서도 미숙성이 드러난다. 우선 등장인물이 스테레오타입으로서 성격 진전이 별로 없다. 등장인물들이 작품 속에서 어떤 사건으로 인해 자동적으로 움직여 나가는 등장인물이 아니라 작가가 의도적으로 만들어놓은 로봇에 불과하다는 이야기이다. 격변하는 사회 속에서 내적 갈등이 없는 인물에 생명이 깃들 수 없음은 자명하다. 이처럼 조일재는 시대를 응축한 성격을 전혀 창조해내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병자삼인은 희곡사나 연극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하고 다만 희곡문학이 불모일 때 발표되었다는 데서 그 의미를 찾을 수밖에 없다.
조일재와 같은 시기에 신파극운동을 주도했던 윤백남도 1910년대에 두 편의 희곡을 남겼다. 1918년을 전후해서 쓴 국경과 운명 두 편이 바로 그것이다. 윤백남은 개화기에 은행원, 대학강사, 극단 대표 등 다방면에 걸쳐 활동한 선구자로서 1918년부터 응모화, 기연, 시주, 황금 등 단편소설도 발표한 바 있다. 신소설 계열의 이러한 단편소설을 발표한 시기에 단막희곡도 두 편이나 쓴 것이다. 그러나 안국선의 소설 세계와 궤를 같이한 소설을 썼던 만큼, 윤백남의 희곡도 문학적 주제는 그 수준에 머물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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