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후반에 우리나라는 서구 문명과 접촉하면서 새로운 문학사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새로운 시대의 문학이 한국의 근대문학은 아니다. 물론 한국 근대 시의 경우에는 그 무엇보다 서양 문명의 시의 영향이 각별하다는 것은 여러 사람이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서양 문명의 시, 즉 서구 시의 경험이 한국 근대 시를 형성시킨 요인이 된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외부적인 영향일 뿐, 한국의 시 자체 내의 전통적인 경험과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다. 이 시기에는 반전통적이라는 서구적인 충격과 그에 따른 반작용인 전통적 경험과 이러한 모순적 양립을 한국 근대 시는 처음부터 자체 속에 경험하고 있었다. 이러한 전통성과 반전통성 사이에서의 갈등과 대립, 그리고 긴장을 겪으면서 한국시의 근대성은 발생하고 계속해서 발전해 온 것이다. 초창기 신시나 자유시에서 서구 시와 접촉하면서 이루어진 한국 근대 시가 다시 전통적 경험으로 귀의함으로써 자기 동일성을 이룩하였다는 역사적 아이러니 속에 한국시의 '근대성'은 마련되고 있다.
한국의 문학 역사가 있어서 '근대' 또는 '현대'가 1919년의 삼일 운동을 전후로 잡는 것이 통설처럼 되어 있으나, 앞서 보았듯이 근대성과 현대성은 이전부터 계속해서 발생, 발전해 왔다. 1910년대 시가 형식 면에 있어서 이미 새로운 것을 갖추었다 해도 근대 시가 되기 위해서는 다른 모든 문화적 표현 형식과 함께 내부에서 발효되는 새로운 감수성의 출현을 기다려야 했다. 따라서 근대 시의 형식을 최초로 자각한 것은 1910년대의 시인이었지만, 근대적 시의 형식을 본격적으로 표방한 것은 1920년대에 와서였다. 1910년대 시는 개화기 시가에서 근대 시로 넘어오기까지의 과도기적 역할을 행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근대 시의 전사로서 시사적 의의를 가지는 것이다. 19세기 후반에 우리나라는 서구 문명과 접촉하면서 새로운 문학사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새로운 시대의 문학이 한국의 근대문학은 아니다. 물론 한국 근대 시의 경우에는 그 무엇보다 서양 문명의 시의 영향이 각별하다는 것은 여러 사람이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서양 문명의 시, 즉 서구 시의 경험이 한국 근대 시를 형성시킨 요인이 된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외부적인 영향일 뿐, 한국의 시 자체 내의 전통적인 경험과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다. 이 시기에는 반전통적이라는 서구적인 충격과 그에 따른 반작용인 전통적 경험과 이러한 모순적 양립을 한국 근대 시는 처음부터 자체 속에 경험하고 있었다. 이러한 전통성과 반전통성 사이에서의 갈등과 대립, 그리고 긴장을 겪으면서 한국시의 근대성은 발생하고 계속해서 발전해 온 것이다. 초창기 신시나 자유시에서 서구 시와 접촉하면서 이루어진 한국 근대 시가 다시 전통적 경험으로 귀의함으로써 자기 동일성을 이룩하였다는 역사적 아이러니 속에 한국시의 '근대성'은 마련되고 있다.
한국의 문학 역사에 있어 '근대' 또는 '현대'가 1919년의 삼일 운동을 전후로 잡는 것이 통설처럼 되어 있으나, 앞서 보았듯이 근대성과 현대성은 이전부터 계속해서 발생, 발전해 왔다. 1910년대 시가 형식 면에 있어서 이미 새로운 것을 갖추었다 해도 근대 시가 되기 위해서는 다른 모든 문화적 표현 형식과 함께 내부에서 발효되는 새로운 감수성의 출현을 기다려야 했다. 따라서 근대 시의 형식을 최초로 자각한 것은 1910년대의 시인이었지만, 근대적 시의 형식을 본격적으로 표방한 것은 1920년대에 와서였다. 1910년대 시는 개화기 시가에서 근대 시로 넘어오기까지의 과도기적 역할을 행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근대 시의 전사로서 시사적 의의를 가지는 것이다. 신시, 자유시, 산문시는 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형식이다. 신시, 자유시, 산문시는 한결같이 그 이전의 정형성에 대한 반명제이자 자유시 지향이라고 보아 틀림이 없다. 구어체의 사용과 같은 형식의 실험 또한 개화기에서 1920년대 시에 이르는 그 중간단계인 과도기의 시적 변모라고 할 만하다.
누가 뭐라 해도 1910년을 전후한 한국 시단의 일인자는 육당 최남선이다. 그는 왕성한 의욕과 정력으로 처음부터 창가, 신시, 시조 등 다양한 시 형태를 거듭하여 발표했다. 그의 시편에서 보여준 형식의 실험은 그 이전의 4, 4, 3, 4조의 정형성 앞에서는 글자 그대로 낯섦이었으며 당시로서는 대담한 혁신이었다. 형태 면에서 신구 장르의 다양한 시도 그 자체가 역설적으로 다름 아닌 자기부정, 자기 분열을 보여주는 것이 된다. 한쪽에서는 이미 있어온 전통적 리듬을 따르기도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외래적인 리듬을 시도하기도 하며 또한 전통적 리듬과 외래적 리듬을 변조하기도 한다. 전통적 리듬과 외래적 리듬, 그 어디에도 자신을 동일화할 수 없는 구심점의 상실을 육당의 시가는 처음부터 경험하고 있었다. 그만큼 육당의 시가는 '구래의 시'와의 갈등과 그에 대한 거부 그리고 새로운 경향과의 충돌로 리듬의 무정부 상태로 얼룩져 있었고, 그것은 주로 육당 자신의 사상적 방황 등으로까지 이르고 있다. 근대문명을 예찬하기 위하여 또한 조선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거기에 알맞은 형태를 동시에 시도한 것은 역설적으로 육당의 시가가 자기 부정과 자기 분열로 나타나고 있음을 증언하는 것이 된다. 서구를 철저히 경험한 신시의 경우 더욱 그렇다. 신시 형식이 한 연을 보면 자유시이고, 연이 바뀔 때마다 행의 일정한 글자 수가 되풀이되는 시형과 처음부터 아무런 율격적 원리가 없는 자유시 형이 뒤섞여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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