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는 6·25 전쟁으로부터 시작되어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어지는 다사다난한 연대였다. 전쟁에 의한 참혹한 피해와 이의 복구는 1950년대를 관통하는 시대사적 명제였다고 할 것이다.
특히 이데올로기를 전면에 내세운 6·25 전쟁은 민족상잔이라는 비극을 낳았으며, 이로 인해 분단 체제는 고착화되었다. 그 결과 안보의 논리는 그 어떤 통일론에도 우선하는 절대 불가침의 신성화를 초래하였다. 민족 해방의 논리이건 절대 안보의 논리이건 간에 모두가 6·25 전쟁을 발판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은 1950년대의 시대사를 개관하는 중요한 관점이 된다. 이 비극적인 전쟁을 통해 민족 분단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고착화되었고, 이를 빌미로 두 쪽으로 갈린 정치 체제는 권위주의적이며 독재적 권력의 아성을 확고히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양극화 현상은 전쟁을 유발한 북쪽이나 유엔군의 도움을 얻어 겨우 원상회복을 한 남쪽이나 양측 모두에게 적용될 것이다. 어쩌면 6·25 전쟁은 일제로부터 해방된 조국이 38선을 경계로 남쪽에 미군이, 북쪽엔 소련군이 분할 점령하였다는 사실에 원천적으로 기인하고 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한반도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냉전체제에서 강대국들의 세력 쟁탈전의 대상이 되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대다수 국민이 공산주의나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도 제대로 모르고 있는 상황에서 전쟁의 와중에 휩쓸려 들어갔으며, 이 전쟁으로 인해 희생된 수백만의 죽음을 과연 이데올로기 그 자체 명분만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1950년대를 둘로 나누어보자면, 1950년대 전반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생존 그 자체의 문제가 급선무였던 시기이며, 1950년대 후반은 전후의 복구와 앞으로의 민족적 지향성을 확립하는 것이 과제였던 시기라고 하겠다.
여기에는 6·25 전쟁 이전과 이후를 명백히 다르게 규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가정이 포함될 수밖에 없다. 민족이 해방되고, 1948년 각각 남북한의 단독정부가 수립되기는 하였지만, 아직도 당대인들의 마음속에는 통일에 대한 희망이 담겨 있었을 터이며, 분단이 무엇이고 체제가 무엇이며 이데올로기가 무엇인가에 대한 확연한 구분도 없었을 터이다. 그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던 민족공동체적 이상이 6·25 전쟁으로 인해 여지없이 해체되었던 것이다. 수백만 명이 희생되었고, 민족의 대이동 과정에서 일천만의 이산가족이 생겼지만, 이제 엄청난 분단의 벽을 현실적으로 인정하고,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 고착화는 당대로서는 언제, 어떻게 해결될 것인지를 전망할 수 없는 민족사 최대의 쟁점으로 등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후 40여 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날 아직도 미해결의 난제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더욱 역설적인 것은 분단이 기정사실로 고착회되자 권력 담당 층은 이를 빌미로 독재권력을 정당화시켰으며, 1950년대 후반 독재권력의 타락은 1960년 4·19에 이르러 붕괴되기에 이르렀다는 사실이다. 이 전 과정을 조감해 보자면, 1950년대는 민족적인 신성한 것을 찾기 위한 몸부림이었으며, 밖으로부터의 충격에 대응하여 안으로부터 폭발하는 역사적 추진력의 자기 발견 시대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쟁으로 인한 죽의 공포와 굶주림 속에서도 생존을 위한 한국인인들의 처절한 자기 극복의 몸부림은 식민지 시대 이후 한민족이 겪어야 했던 온갖 수모를 떨쳐버리겠다는 시대사적 명제였는지 모른다. 폐허가 된 산업시설과 민족상잔의 정신적 불모성 속에서 시련이 가중될수록 이의 극복 의지로 강화된다는 참담한 교훈을 1950년대는 묵시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1950년 전반을 압도하는 시는 전쟁 현장의 시이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많은 문인은 이에 대응하여 격서를 쓰고, 피난길에서는 '문총구국대'를 편성하여 활약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체계적으로 조직된 것은 1·4 후퇴를 전후한 시기이며, 육군에는 구상, 박인환, 유치환 등, 공군에는 김윤성,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 등이 참가하였다. 9·28 수복이 되자 이광수, 김동환, 김억, 정지용, 김기림 등은 납북되었고, 설정식, 이용악 등 좌익계 시인들은 월북하였으며, 김동오, 구상, 박남수, 이인석 등은 월남하였다. 이로 인해 문단은 재편성되었으며, 이후 분단 시대의 문학이라는 비극적 상황이 어쩔 수 없이 주어졌다고 하겠다.
1930년대 모더니즘의 감각과 기법을 보다 직접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박인환, 조향, 김경린, 이봉래 등이 주축이 되어 1951년 피난지 부산에서 조직된 '후반기' 동인들이었다. 아마도 이들이 '후반기'라고 내세운 이름 자체가 은연중에 1930년대를 의식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김기림의 제자이기도 했던 김규동은 1950년대 모더니즘 시운동의 이론적 근거와 방향을 살펴보면, 김규동의 모더니즘 시론은 청록파류의 보수적이며 정태적인 서정시에 대한 정면비판으로 시사적 의의를 가진다. 물론 이들의 이론적 비판이나 실제 작품을 통한 시운동이 당대에 크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그 나름의 논리적 설득력은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시가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기보다는 논리와 자가당착적인 면을 보였다는 것은 또한 그 자체가 지닌 커다란 한계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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