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국문학사

1950년대 전쟁 체험과 소설 2

by 데일리쥬 2024. 11. 29.

  앞에서 6·25는 1950년대 이후의 소설이 사회적인 단층의 상상력을 편재화시키는 의미가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래서 반역과 희생의 인간상이 많이 제시됨은 물론 전쟁은 기존의 가치를 교란·분해하고 파손시킨다는 상상력이나 인식이 두드러진다. 먼저 정한숙의 「고가와 곽학송의 「바윗골」 등은 전쟁을 계기로 해서 신분과 계급의 변화가 일어나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말하자면 가족 체계와 신분 구조의 변화의 수직 이동을 통해서 가치 체계에 미치는 전쟁의 충격을 제시한 것이다. '고가는 비록 단편이긴 하지만, 일종의 가족사나 가족사 연대기 성격을 지니고 있는 작품이다. 현대의 가족사 소설의 성격이 그러하듯, 이 작품 역시 한 가족의 특수한 변천사 속에 근대에서 현대로 이르는 이 땅의 정치사와 사회가 축약되어 있다. 즉, 대한제국 말, 일제 강점기 그리고 해방과 6.25로 이어지는 역사의 변천 속에서 봉건적인 토지 소유의 지배층 장동 김 씨 가문이 겪는 권위와 결속의 분해 및 도전받는 과정을 그린 것이다. 이러한 몰락 내지는 분해의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6.25이다.

 

  '이전'과 '이후'의 서술적인 균형에 있어서 전자에 더 역점을 두고 있는 이 작품은 전쟁 이전에도 분해나 변화의 단서와 요인이 잠재되어 왔었던 것이 사실이다. 종가 제도를 끝내 유지하려는 보수적인 조부에 대항해서 일가의 종손으로 하여금 머리를 깎고 신학문을 배우게 하려는 진보적인 숙부의 반역이 그것이다. 그리고 김 씨 집안에 상존하고 있는 적서와 노비의 신분 제도가 만든 내재적 갈등 역시 그 요인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잠재적 요인들이 6·25로 인해 마을을 인민군이 점령함으로써 이제까지의 신분 계층의 수직적인 이동이 급격하게 이루어질 뿐 아니라 가치 체계의 전환이 뚜렷하게 나타나게 된다. 즉, 김 씨 가문에 대해서 고갯짓도 하지 못하던 재 너머 이 씨 마을 사람들이 반기를 들고, 장동 김 씨의 핏줄을 타고났으면서 '종년의 자식'으로 늘 박대받던 이단자 태식이가 인공 치하에서 벼슬을 하여 우쭐거리며 그를 박대한 할머니가 기거하는 사랑채에 불을 지른다. 그리고 지순한 종이었던 길녀 또한 부락의 여성동맹 원으로 활약하는 등 모두가 놀라운 변화를 일으킨다. 이런 놀라운 변화와 함께 거듭된 죽음과 화재로 인해서 종가로 표상되는 전통적인 가족의 권위와 가치는 쇠퇴와 소멸의 운명에 빠져들고 만다. 그런 점에서 1950년 이래의 소설에서 6·25는 이데올로기의 전쟁인 동시에 고전적인 신분 전쟁 성격을 지니기도 한다. 가치의 분해는 안수길의 세상 인간형에서처럼 삶의 양식을 허물거나 변화시키기도 한다.

 

  한편, 1950년대의 소설은 전쟁으로 인해서 신체적인 훼손을 입거나 정신적인 피해와 상처를 입은 사람들을 대표적인 주인공으로서 입상화한다. 이런 손상된 삶에 대한 현저한 인지는 단순히 그것이 피해의식의 반영이 라기보다는 전쟁으로 파손된 삶의 가장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핵심으로서 받아들인 결과이다. 즉, 불구화된 신체나 정신은 전쟁에 침해받은 현실의 가장 구체적인 희생자로서의 표상이다. 손창섭의 혈서」 「비 오는 날 등 일련의 작품, 오상원의 '백지의 기록, 서기원의 암사지도 「이 성숙한 밤의 포옹 하근찬의 수난이대, 이호철의 파열 등에 나타나는 인물들은 모두 전쟁 상황에서 신체적으로 또는 정신적으로 깊은 손상과 재화를 입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 가운데서 "백지의 기록은 전장으로부터 돌아온 두 사람의 형제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형제인 중섭과 중서는 둘 다 전선에서 불구의 상태로 귀환한다. 군의관인 중섭은 부하를 구하려다 오른손이 보기 흉하게 뭉개지고 되고 다리 하나가 절단된다. 그리고 동생인 중서는 비록 외양으로는 온전한 몸으로 돌아오긴 했으나 그 대신 정신의 상처가 깊이 파인 허무주의적 상태이다. 이들은 전쟁 이 전에는 전혀 불구 상태에 있지 않았지만, 전쟁은 그들의 삶의 잠재력을 와해시켜 버린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그때'와 '이때'란 시간부사에 의해서 상황이 현저하게 대립 구조를 이루는 것이다.

 

  손창섭의 혈서」 「비 오는 날」 등으로 대리되는 불구화와 불건강성이 함축된 세계 역시 1950년대 소설의 독자성을 이야기하면서 중요한 비 중을 가진다. 병자와 불구자와 의욕 상실자가 거의 집단으로 서식하는 그의 그로테스크한 세계는 정신적인 가치의 지표가 유실되어 버린 전쟁 직후의 실존적인 삶의 상황을 병자의 세계를 끌어들여 독특하게 데포르마시옹 하고 있는 것이다. 하근찬의 '수난이대는 아들의 귀향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심리적인 명암, 성냥불로 연상되는 과거의 기억, 주인공의 일정한 버릇, 외나무다리의 포치에 의해서 치밀하게 짜인 구성 속에 부자 이 대가 역사로부터 받는 신체적인 불구화 현상을 제시함으로써, 전쟁이 인간에게 가하는 물리적인 폭력의 실체와 삶의 재수습 과정을 드러내 준다. 이와는 달리 제대군인, 도망병 그리고 상이군인이 등장하는 서기원의 암 사지도』 「이 성숙한 밤의 포옹은 비록 신체적인 불구화는 아니더라도. 전쟁으로 인해 기존의 윤리와 가치가 벽지처럼 진공 상태가 되어버린 데서 기인한 실존적 불안의 상황 속에서 꿈과 의욕과 주체를 잃어버리고 폐허가 되어버린 집에서 나태와 패덕한 쾌락 속에 빠져드는 젊은이들의 정신적으로 파손된 삶을 제시한다.